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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 原硏哉

국내에 다수의 팬을 보유한 세계적인 디자인 대가 하라 켄야가 지난 1월 8일 ACA(Asia Culture Academy) 수업차 한국을 방문했다. 무인양품, <리 디자인> <햅틱>전 등을 통해 잘 알려진 그는 디자인하는 ‘과정’에 주목하며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접하고 있자면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역량을 뛰어넘어 마치 ‘디자인을 디자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질만능주의와 세계적 경제난에 빠진 오늘,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조언을 얻고자 월간 <디자인>이 그를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profile
1958년생. 무사시노 미술대학교 교수인 동시에 일본 디자인 센터(Nippon Design Center)와 하라 디자인 연구소(Hara Design Institute) 대표인 하라 켄야는 <리디자인: 일상의 21세기> <햅틱> <센스웨어>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는 일본 문화에서 기인하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 중 큰 축을 차지하는 ‘공(空)’의 개념을 일본의 세계적 브랜드 ‘무인양품’을 통해 현실화하고 있으며, 2003년 산토리학예 상을 수상한 <디자인의 디자인>, 일본의 미의식을 디자이너의 눈으로 들여다 본 <백>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디자인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2009년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 제품 카탈로그 내지 이미지
무인양품은 ‘생활의 형태’라는 제한된 상황, 즉 집을 통해 7000품목을 하나로 묶어 소비자에게 제안하고 있다.


하라 켄야는 인터뷰가 예정된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뒤 기자가 대기하고 있던 좁은 방으로 들어왔다. 180cm가 족히 넘을 정도의 큰 풍채를 갖춘 그는 먼저 다가와 정중히 명함을 건네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답에 응하며 눈이 내린 창밖을 자주 응시했고, 인터뷰 내내 진지했으며, 매우 차분했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옆으로 돌아서 마신다거나, 손윗사람을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김치나 막걸리, 지짐이 등 한국 요리도 무척 좋아합니다. 한국은 여러 면에서 왠지 일본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비슷하지만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지형적으로 일본과 한국은 매우 가까이 있고, 앞으로 아시아의 시대가 되어 간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단순히 이웃 나라로 생각하기보다 동지 의식을 가지고 한국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가장 일본다운 브랜드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은 하라 켄야의 디자인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인양품은 1980년 일본 그래픽 디자인계의 전설 다나카 잇코(田中一光)와 일본 유통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한 츠츠미 세이지(堤清二)에 의해 소매 유통업으로 처음 시작했다. 하라 켄야 디자인 철학의 핵심인 ‘공(空,  emptiness)’의 개념은 무인양품의 7000품목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는 18세와 60세에 맞는 테이블을 따로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18세나 60세 모두 이 테이블은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의 심플(simple)과 그가 말하는 ‘공’의 결정적 차이다. 무인양품은 단순히 디자인이 뛰어난 브랜드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소비자에게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본 최고 디자이너 간의 세대교체를 통해 디자인 DNA를 전수하며 후카사와 나오토(深沢直人) 같은 톱 클래스 디자이너들과 힘을 모아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키워내고 있다는 데 있다.

무인양품은 일본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기존 슬로건인 ‘이유가 있어 싸다’에서 ‘이것으로 충분하다’로 한 차원 더 발전시키며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무인양품이 처음 태어난 해는 1980년입니다. 당시 일본은 거품경제의 전성기로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물건이 넘쳐나던 시기였습니다. 그 와중에 무인양품이 등장했지요. 제품을 호사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생산의 프로세스와 패키지 등을 합리화해 소박하고 간소하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 무인양품의 철학은 2002년 다나카 잇코로부터 아트 디렉션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에도 바뀌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인양품은 처음에 40품목으로 시작했지만, 현재 7000품목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슈퍼마켓의 사설 브랜드였기 때문에 제조업이 아니라 소매유통업에서 시작했습니다. 직접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보니 제조사에 요청해 ‘색은 흰색으로 해주세요’라든지, ‘색 없이 부탁 드려요’라는 식으로 운영됐습니다. 미완성적인 면이 많이 있었죠. 무인양품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생략해 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많은 제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제가 고문의 멤버가 된 이후부터 프로덕트 디자인은 후카사와 나오토 씨가 담당하는 등 디자인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제품을 제대로 만드는 방향으로 보완해 나갔습니다. 형언하기 힘든 역설적(paradoxical)이고, 신비한 디자인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디자인을 하지 않은 듯한 디자인을 한다’는 제2기(期)로 넘어간 것이지요.

무인양품의 광고(2003년, 몽골리아 평원 편)
무인양품의 광고는 가능한한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무인양품’이라는 로고 자체가 모든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만을 표현한다. 5~6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있는데 사원 모집 문구는 ‘디자인하지 않은 디자이너 모집’이다. 무인양품의 카피라이터는 ‘시’를 죽여야 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무인양품의 디자인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그 숨은 의도가 궁금합니다. 기업에게 상품이나 제품은 나무에 열린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일의 품질을 좋게 만들어 보겠다고 과일에 장식을 달아 봤자 소용이 없지요. 그 열매의 품질을 좋게 만들려면 나무를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좋게 만들려면 그 나무가 심어져 있는 토양을 좋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 토양의 품질을 향상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욕망의 에듀케이션’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시장의 크기가 달라 뉘앙스가 다를 수도 있지만, 일본 기업이란 일본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자동차가 좋은 열매가 되려면 일본이라고 하는 경제・문화권 사람들이 지닌 자동차에 대한 욕망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토양에서 자란 나무의 열매, 자동차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지는 것입니다. 열매만 디자인한다고 다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동차에 대한 수요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노골적인 표현인지라 더 좋은 말이 있다면 그것으로 대체하고 싶기는 해요. 어쩌면 욕망이라는 말을 ‘희망’이라고 바꿔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소비자가 지닌 욕망을 ‘희망의 수준’ ‘희망의 질’이라 표현한다면 그 희망의 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고민하는 게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라는 대상은 선생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잘 에듀케이트되던가요? 제가 ‘에듀케이션 하는 사람’, 즉 ‘교육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인양품이 교육자라는 것도 아니죠.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란 자기 자신이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브랜드는 소비자가 ‘이것이 갖고 싶어’라는 욕망을 환기시키는 상품을 만듭니다. 기업은 그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심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경제를 일궈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뭔가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경이나 자원 문제도 있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똑똑해질 필요가 있어요. 무인양품의 상품을 살 때 ‘이것이 갖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그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제품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이성적이고 똑똑한 것’임을 깨닫는 게 기분좋은 일이라는 것을 사용자 스스로 각성(awaken)해 나가는 것입니다.

뛰어난 디자인 전략이 있어도 클라이언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는 없으셨나요? 무인양품이라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요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인양품도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면 안 되고, 물건이 회전하지 않으면 안 되죠. 이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고 상품은 팔리지 않는다면 무인양품이 아랍권 회사에 매수 당하는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무인양품도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의 조건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이상적인 것을 잘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이윤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저는 무인양품의 어드바이저인 동시에 디자인도 수주하는 독특한 관계입니다. 조언을 하는 입장과 그곳의 디자인을 담당하는 입장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에게 클라이언트는 무인양품이 아니라 소비자라 볼 수도 있습니다. 소비자가 그저 싼 가격만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그냥 놔둬도 모든 제품이 좋아질 텐데…, 역시 그런 사이클을 어떻게 만들어 갈까에 대한 고민이 관건입니다. 결국 어떤 문화를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서로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지가 없는 시장은 의지가 있는 시장에게 반드시 패배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매니지먼트 할까 하는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특효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문화가 대단히 취약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햅틱>이나 <센스웨어>전을 통한 시도도 시장에 대한 제 의사 표명 중 하나입니다. 디자이너는 역시 그런 일을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런 건 어떤가요?’ ‘이런 것도 멋지지 않나요?’ 혹은 ‘이런 미래를 만드는 건 어떤가요?’라고 제안해 나가는 사람이라는 거죠.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고 말하면 “역시 하라 씨는 굉장히 선생님답네요”라고 많이 생각하겠지만 각성해 나가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희망의 질’을 스스로 발견하고 개선함으로써 더 좋아지는 ‘깨달음(気づき)’이라고 해야할까요.


2000년 기획한 <리디자인: 일상의 21세기>전에 선보인 디자인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32명의 디자이너에게 일상의 제품을 다시 디자인하게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져 온 ‘일용품’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드러나는 ‘생각의 차이’를 통해 디자인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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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반 시게루(坂茂)의 화장지. 사각형 종이 심은 종이를 잡아당길 때 달그락거리며 걸리게 돼 있어 동그란 심에 비해 휴지를 절약할 수 있고 운반 시 공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2 광고・영화감독 사토 마사히코(佐藤 雅彦)의 출입국 스탬프. 비행기 방향을 반대로 해 출국과 입국을 표현한 것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하루 평균 5만 명의 외국인에게 ‘일본인들이 재미있는 생각을 했구나’라는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3 조명 디자이너 멘데 카오루(面出薫)의 성냥.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끝에 발화제를 입힌 것으로, 지구로 환원되기 전 마지막 일을 시켜 보자는 발상을 담았다.

 


출처 : 디자인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하라 켄야 - 낭중지추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