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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소박한 삶
카테고리 자기계발
지은이 레기네 슈나이더 (여성신문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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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산업국에서는 한 사람이 평균 1만 가지의 상품을 소비하며 살다가 간다. 전기로 작동되는 빵 써는 기계며 리모컨으로 여닫는 차고 문, 배터리를 사용하는 따뜻한 열쇠와 열쇠구멍을 비추는 손전등 같은 것들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이런 건 비곗살 같은 삶이다.

과연 쓸모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제품들이 매우 유익한 물건인 양 소개된다. 빵가루 전용 흡입청소기, 빨간 전구들을 이용해 모닥불이 지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전자 레인지, 장식품 인형 같은 전기 주서, 차 끓이는 기계, 채소 믹서 등을 사용하면 부엌일이 쉬워진다고 하지만, 베를린의 가정학 교수인 게르다 토르니포르트는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채소 믹서를 쓴 다음엔 기구를 씻어내야 하므로 오히려 손으로 으깰 때보다 시간이 더 든다. 그리고 자동으로 뽑아낸 차는 맛이 없다. 게다가 채소 믹서는 작은 양은 갈지 않고 그저 용기의 내벽에 흩뿌릴 뿐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부엌 조리대 공간과 시간과 돈을 아끼고 싶다면 튼튼한 차 주전자, 다지기 칼, 세라믹 절구를 사용하라고 전문가는 권한다.

이제 한적함과 고요함이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걸 얻으려면 매우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너무도 자극을 받은 나머지 이제는 오히려 고독과 정적을 겁내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너무도 낯설어진 것이다.
 이전 같으면 깨끗한 물과 공기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다지 넉넉지는 못해도 가난한 사람들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지구의 마지막 남은 한 줌 청결한 자연은 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돈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무공해식품을 사지도 못하고, 대량사육된 고기와 오염된 과일과 야채를 집어들 수밖에 없다.

커피의 종류를 구분하거나 세제들을 태스트해보는 데 내 인생의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어요. ... 가격을 비교하거나 하지도 않아요. 그냥 알디 세제라는 걸 사면 되니까요. 그걸로도 세탁은 말끔하게 되거든요. 그러면 전 만족하지요. 물론 더 성능이 좋은 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어떤 상표인지 알아내 구하려고 애쓰지는 않아요.

늘 선망과 질투하는 눈으로 남들은 어떻게 사나 하고 남들만 쳐다본다면, 그건 병들어 있는 삶이에요. '저 집은 또 새 차를 구입했군. 우리도 당장 사야지.' 이런 식이어선 곤란하지요.

난 야콥스 크뢰눙 커피가 좋아...하지만 그런 건 모두 몹시 작위적인 일이지요. 그런 선택과정은 진정 자신에게 유익하고 혹은 해로운 게 뭔지 깨닫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이 일종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보세요.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물건에 구속당하는 것이고, 거짓된 자유가 아닌가요?

이제 사들인 물건들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가지 않고, 단지 죄의식이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놓거나 심지어 갖다 버리기도 한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병을 안 보이는 도처에 숨겨놓는 것과 같다.

의사인 악셀 문테는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아주 적은 돈으로도 가질 수 있다. 필요 이상의 것들만이 비용이 많이 든다."

가난의 파급은 또 다른 현상도 불러일으킨다. 돈이 적으면, 소비도 그 수준에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싸구려 물건은 쉽사리 망가진다. 그만큼 쓰레기더미는 불어나고 자연은 착취된다. 경제는 항상 더 많은 생산을 요구한다.

예전엔 가스 곤로 한 개에 냄비 몇 개, 접시 약간만 있으면 충분했다. 오늘날엔 수려한 세트 부엌에 온갖 종류의 부엌기구들, 습기 제거기, 가스 오븐, 전자 레인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식사가 예전보다 더 맛있어졌고 준비하는 시간도 짧아졌는가!

경제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관습에 근본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성들에게 자기들만의 수입을 확보할 기회가 점점 더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여성해방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개혁정책과 경제적 번영이 가출한 젊은이들에게까지도 집을 마련할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이 대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면, 1960년대에 그토록 심각한 세대갈등이 발생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소비에 대한 불만족을 느꼈다면, 그건 국민 경제에 하나의 큰 재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상품이나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테니까요. 식품제조 분야에서는 유기식품에 대한 수요가 늘 수도 있겠죠. 어째든 가격은 더 비쌉니다.

딸기도 6월에 먹어야 제맛이 나는 법이죠. 1년 내내 딸기만 먹는다면, 먹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지난 여름에는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이 있었는데, 계속 참고 기다렸지요. 그렇게 기다리고 나면 보답이 있게 마련이죠. 여름 대바겐 세일이 지난 다음에 그 옷을 반값에 살 수가 있었습니다.

과소비를 그만둔다는 것과 인색하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주위 환경을 파괴하면서까지 이득을 챙기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착복해서 자기 배를 채웁니다.

배가 고픈 채로는 절대로 쇼핑을 가지마라.

당장이라도 사고 싶은 충동이 밀려오는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우선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기다리십시오. 가만히 계세요. 뒤로 미룬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생각을 갖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당신한테는 이게 필요해요'라고 한다 해서 상점에 들어가 그 물건을 사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저는 소란스런 영화들에서 케이크를 던지며 싸우거나 스파게티로 장난치는 장면이 나오면 웃어넘길 수가 없습니다. 자리를 뜨고 말지요. 그런 장면을 잠자코 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티셔츠에 상표를 붙이는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상품들마다 이런 저런 문구들을 인쇄해넣는다거나, 식기에 요란한 무늬를 새기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일입니다.

첫째, 디자인은 반드시 단순하고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 둘째, 제품에 꼭 맞는 그리고 질 좋은 소재를 선택해야 한다. 셋째, 디자인과 색상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즉 제작과정에 빈 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손이나 귀에 금장신구를 착용한다면, 그건 일생 동안 쓸 정도로 순도 높은, 값진 것인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한 100년은 족히 갈 고급 옷장을 사지 않고 싸구려 백화점 가구를 사는 것이 오히려 돈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전에 산 가구는 이제는 고물이 되었습니다. 아주 견고한 고급가구를 사서 100년 동안 쓰는 편이 오늘 이케아에서 싼 가구를 샀다가 6년 뒤에 버리고 새로 사는 것보다 이득이라는 말이 됩니다.

저는 브래지어를 살 때도 몇 년은 쓸 수 있는 좋은 품질로 삽니다. 물건마다 항상 여러 개씩 자기 주위에 굴러다니면 우선 정돈이 힘들어서도 좋지 않습니다. '적지만 좋은 품질로!' 그러면 물건들이 눈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사용도 수월하지요.

쇼펜하우어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한없이 연민하는 마음이야말로 윤리적인 행동의 가장 굳건하고 확실한 기반이며,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다. 연민으로 가득 찬 이는 분명 타인을 해치지 않으며 억압하지도, 고통을 주지도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에게 관대하고, 모든 이를 용서하며,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고자 할 것이다. 그의 행동은 정의와 인간애의 표현일 것"이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읽을 줄 알 뿐 아니라 생각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어째서 무기밀매로 억만장자가 된 카쇼기 같은 대량 살인범이 자선 파티의 스타급 손님이 되는지 의혹을 품게 될 것이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카쇼기가 자선 파티에 나타나고 전쟁으로 상해를 입은 아이들을 돕는 유니세프 기구에 의해 찬양을 받는지 말이다. 이것보다 엽기적인 일을 나는 떠올릴 수조차 없다. 자선 파티를 연 주최측 마담은 이제 그와 손에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어깨동무를 하고, 너나없이 환하게 웃으며 모든 신문화보에 등장할 것이다. 전쟁을 부추기는 무기밀매자가 자선하는 천사로 소개되는 것이다. 언론매체뿐 아니라 그 소비자도 한 통속의 바보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정말 요지경 속 세상이다.
의식수준이 달라져야 한다. 아이들도 사물의 배경을 사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깨어 있지 않다면, 대체 누가 가르쳐주겠는가? 어른들은 무관심에 함몰되어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졸라댈 때마다 들어주고 그걸 부모사랑이라고 착각하는 한 아이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또 글쓰는 게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은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다.